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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희 (충남서천교육지원청 교육장)

[교육 칼럼] 너를 기다리는 동안

  • 칼럼
  • 입력 2018.12.24 16:39
  • 수정 2018.12.25 08:33
신경희 충남 서천교육지원청 교육장.
신경희 서천 교육장

12월도 이제 몇 일 남지 않았습니다. 한해를 시작한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여기까지 왔습니다. 아쉬움에 돌아보지만 되돌아갈 수 없는 날들입니다. 세월의 군살 배긴 허전한 모습이 유리창으로 번집니다. 제법 잘 살아온 날들도 많았던 것 같은데, 문득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삶의 헛헛함에 내 모습이 허우룩하게 느껴집니다. 그렁그렁 고여 온 그리움들이 하롱하롱 꽃잎이 지던 어느 봄날처럼 여민 가슴 틈새로 툭툭 터져 나옵니다.

2주전인가 봅니다. 새벽에 우리교육청 영재교육원 학생들 제주도 현장체험학습 출발 인사를 하고 사무실에 들어오니 아침 720분이었습니다. 남아 있는 어둠들이 청사 밖 목련 나목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던 고요한 시간에 홀로 앉아보니 그제야 보이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책상 위에서 오랫동안 잠을 자고 있던 책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중에 한 권을 집어 들었습니다. 정재찬의 <시를 잊은 그대에게>, 부제로 공대생의 가슴을 울린 시 강의입니다. 얼마 전, 우리 관내 교원 힐링 드로잉 콘서트자리에 함께 한 선생님들과 나눈 바로 그 책입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시()를 만나는 일은 꿀처럼 달콤한 행복을 부리는 순간입니다. 마른 잎새처럼 메말라진 가슴에 단비를 내리는 일이기도 하지요. 또한 내게는 특별한 약속을 지켜내는 선물입니다. 그 특별한 약속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한 끼의 시()라도 먹자인데, 바쁘다는 이유로 굶은 날이 더 많았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끼니는 꼬박꼬박 찾아 먹었는데도 말입니다.

회색빛 책 표지를 만지작거리며 마른 뿌리, 목 타는 잎을 한 뼘 두 뼘 적시며 골고루 스며들게 천천히 읽었습니다. ()가 머무는 곳마다 마음에 화사한 꽃이 피어났습니다. 차가운 공기와 함께 폐부 깊숙이 밀고 들어오는 시구(詩句)마다 밑줄을 그으며 흠뻑 젖었습니다. 마치 한 편의 콘서트를 마주하는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군살 배긴 마음에 이른 아침부터 시()라는 단비를 맞을 수 있어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누려보는 호사스런 아침이었습니다.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페이지에서 결재 판을 들고 들어 온 누군가로 인해 나의 황홀한 아침 콘서트는 그대로 멈춰버렸습니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온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중략> 정말 그리운 것은 녹 같은 기다림인지도 모릅니다. 삶이 녹슬 정도로 기다리는 그 간절함이 그리운 겁니다. 언젠가부터 그런 절실하고 소중한 기다림을 잃어버리고 삽니다. 소망이 있는 한, 기다림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기다릴 사람이 있다는 것은 더 없이 행복한 일이겠지요.

어린 왕자속 여우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다리는 이가 네 시에 온다면 세 시부터 행복해질 거라던, 그래서 행복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알게 될 거라던 그 여우 말입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기다린다는 것은 어느 하루를 다른 날과 다르게 만들고 어느 한 시간을 다른 시간들과 다르게 만드는 것이다.” 책을 읽다가, 낙서를 하다가, 음악을 듣다가 하던 그 숱한 기다림의 시간들이 그리움의 덧문 너머 노을 빛 같이 되살아났습니다. ‘짧으면 기다림이 아니다. 기다림은 기다랗다던 글귀도 덩굴처럼 감겨 올라왔습니다.

눈을 들어 창밖을 바라봅니다. 저 쪽에서부터 새해가 걸어오고 있는 게 보입니다. 유리창이 간헐적으로 푸르릉 푸르릉 웁니다. 모든 저물어 가는 풍경에는 슬픔이 묻어 있습니다한 때 손이 닿던 기억들은 별자리 속에 나뭇결만 남은 것처럼 높이 어두운 채로 반질거립니다. 올해도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지나온 길이 아득하지만 파란 하늘을 봅니다. 세상만사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쯤이야 이제는 넉넉히 깨달았지만 그래도 삶은 희망입니다.

<황새는 날아서/말은 뛰어서/거북이는 걸어서/달팽이는 기어서/굼벵이는 굴렀는데/ 한 날 한 시/새해 첫날에 도착했다/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반칠환 시인의 새해 첫 기적()를 새삼 떠올리며 2019년 황금돼지 띠 기해년(己亥年)을 기다랗게 설렘으로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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