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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해미(소설가, 대일문인협회 회장)

[김해미 명사칼럼] 고향에서의 한나절

  • 칼럼
  • 입력 2019.07.19 10:53
김해미 소설가
김해미 소설가

모처럼 남편과 고향인 청양에 다니러 갔다. 몇 해 전부터 둘째시숙 혼자 지키고 있는 고향집이다. 한때는 부근의 산과 토지 대부분이 시댁 소유였으나 두 분 떠난 지금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나마 올해는 소작하던 이들이 마다해서 묵는 땅이 적지 않다. 이미 장년이 된 시숙도 힘에 부쳐서, 할 수 있는 만큼만 농사를 짓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고향집 입구에서 제일 먼저 우리를 반기는 것은 초록색 양철대문. 뒷산으로 오르는 작은 언덕 위 보리수 열매는 제 철을 만나 새빨갛게 익었다. 시큼 달콤 떨떠름한 맛을 고루 지닌 그것은 청을 만들면 그 빛깔도 맛도 그만이다.
초여름 고향집의 풍경은 큰애가 어릴 적 그렸던 풍경화와 조금도 변함이 없다. 일찍이 아이의 재능을 확인시켜준 그 풍경화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봄이면 우물가에 소담하게 피어나던 함박꽃은 이미 지고, 붉디붉은 화초 양귀비가 한창이다. 생전에 어머니가 아끼던 부채선인장 끝에 연노란 겹꽃잎도 피었다. 얇은 습자지로 만든 것처럼 어쩌면 이렇게 신비로울까. 용케도 올해 처음 꽃구경을 한다. 샛노란 백합도 아름다움을 뽑낸다. 너무나 분명한 색깔과 크기로 나를 압도하는 백합은 왠지 낯설다. 포도나무를 없애고 심은 것이 분명한 보라색 복분자가 벌써 수확을 앞두고 있다.
뒤뜰엔 앵두가 한참이다. 제법 굵은 그것은 어찌나 달콤하고 새콤한지. 나는 손가락이 빨개진 것도 모르고 고 예쁜 것을 따는 데 열중한다. 요즘엔 장날에서조차 이것을 본 기억이 없다. 온갖 과일이 넘쳐나니 앵두를 찾는 손이 없어서 일게다.
뒷산기슭에 올라 지천으로 자라난 어린 머위와 머윗대를 딴다. 어린잎은 살짝 데치고 머윗대는 된장찌개를 끓여야겠다.
산소를 돌아보고 온 남편이 냇가에 다슬기가 많다며 함께 잡자고 한다. 과연 바위와 풀숲에 다슬기가 다닥다닥 붙어있다. 바지를 허벅지까지 걷어 부친 후, 다슬기 잡기에 돌입했다. 집 앞 냇물이라고 얕보았다가 큰 코 다칠 뻔 했다. 수심을 알 수 없어 허방을 짚기 여러 차례. 어느덧 한 소쿠리의 다슬기를 잡았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니 흰 구름 한 점 없다. 이런 행복감을 전에도 느낀 적이 있었던가. 이제껏 소소한 즐거움은 다 아이들 몫인 줄 알고 살았다. 오늘도 아이들과 함께 왔다면 한걸음 뒤로 물러나 있었을 나다.
홀로 사시던 어머님이 돌아가신 첫해. 고향집 단도리를 할 겸 고추농사를 지은 적이 있다. 일주일에 한 차례 밭을 돌아보는 것으로 농사가 되리라고 생각했던 참 철없던 시절이었다.
잠깐 동안의 노동 후에 사방으로 흩어져서 놀 궁리를 하는 두 아이. 가뜩이나 혼자서 해결해야 할 일이 많은 남편에게 고추 따는 일까지 강요할 수가 없었다. 오롯이 나 혼자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마음이 바빴다. 해지기 전에 일을 끝내야 한다는 강박은 내게 고향을 돌아보고 즐길 여유를 빼앗아 갔다. 무엇보다 강렬한 태양이 문제였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자기 어머니 장례식에 와서 태양 때문에 졸고, 작열하는 알제리의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여 모두의 빈축을 샀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도 절대로 이해가 되지 않은 소설 속 사건이었다.
정말이지 그날의 햇빛은 너무 강렬했다. 처음엔 눈이 너무 부셔서 힘들었는데, 어느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마침 작은 애가 오지 않았다면 어쩔 뻔 했나 모르겠다. 두 애들에 의해 나는 그늘로 옮겨졌다. 조금 더 지체되었으면 아마도 나는 일사병에 걸리고 말았을 것이다.
고추 말리기 또한 난제였다. 그즈음에는 월요일마다 비가 왔다. 때맞춰 말리지 못한 고추는 아무리 신경을 써도 꺼먹게 상해 나갔다. 가까스로 세 근 남짓의 고추 가루를 건졌다. 네 식구 몫으로는 어림없는 양이었다. 태양의 위력을 배운 후 나는 고추농사를 접었다. 농사는 자연과 더불어 여유를 가지고 지어야 한다는 것도 아프게 깨달았다. 뫼르소의 입장 또한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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