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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미(소설가-대일문인협회 회장)

[김해미 명사칼럼] 나의 옛 친구

  • 칼럼
  • 입력 2019.03.25 17:49
김해미(소설가)
김해미 소설가

고교시절 문학 동아리에서 함께 활동했던 윤으로부터 얼굴이나 한번 보자는 전갈을 받았다. 헤아려보니 42년 만이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 몇 차례 전화를 받았고, 가까스로 그의 결혼식에도 참석했지만 대전에 같이 살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살아왔다. 비단 윤 뿐 아니라 참 많은 이들과도 이런저런 이유로 연락 없이 살아왔다.

세상살이가 어찌 맘먹은 대로만 되는 것이던가.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약속장소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160cm가 채 되지 않는 단신의 윤은 넉넉한 몸피와 사람 좋은 웃음으로 손님을 맞았다. 그 자리는 윤의 퇴임식과 함께 이모작 인생의 출발을 알리려고 마련된 셈이었다.

윤은 방글라데시 모 대학의 한국어교수로 선임되어 곧 임지로 떠난다고 했다. 방학 중에 학생들을 인솔하여 몇 차례 봉사활동을 했던 나라. 그곳의 젊은이들에게 보탬이 되고 싶어서 선교사 자격을 갖추고 한국어강사 자격증을 따며 차분히 준비한 결과란다. 인생 이모작을 이렇게 미리 기획하여 준비했다니 참 대단한 친구이다.

그런데 가족과 친구들의 덕담이 오가는 중에 나는, 그의 아버지가 유독 나에게 특별히 기억되는 중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깜짝 놀랐다. 선생님은 몇 해 전 작고하셨고, 그 자리엔 팔순을 훌쩍 넘긴 윤의 노모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쩜, 윤은 아버지를 전혀 닮지 않고 어머니 쪽을 많이 닮았다. 중학교에 입학한 첫 해 여름방학을 앞두고, 교내 게시판에서 전국 중고생 방송극경연대회에 참여할 지원자 모집 광고를 보았다. 성우가 꿈인 내게 방송극이라니, 얼마나 설레는 일인지.

신라 시대의 충신이었던 박제상이 주인공인 방송극의 제목은 신라의 얼이었다. 공개 오디션 후에 내게 주어진 역할은 하필이면 일본인 신하 역이었다. 나름으로 정밀하게 인물 분석을 한 끝에, 나는 내게서 최대한 가녀린 간신배 목소리를 끄집어내어 극중 인물을 연기해 냈다. 그 극본을 쓰고 연출을 맡아 방학 내내 땀 흘리며, 어린 우리들에게 성심으로 방송극을 지도해준 분이 바로 윤의 아버지였다.

선생님의 과한 칭찬으로 혹시 내게 주어질지도 모를 연기상을 꿈꾸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던 시간. 바로 그 직전 아버지를 따라 윤도 시골에서 대전으로 올라왔다 했다. 아쉽게도 전국 중고생 방송극대회는 참가학교가 얼마 없었는지 경연은 무산되었다. 대신 전교생을 모아 놓고 한 차례, KBS 방송을 통해 또 한 차례, 두 번 전파를 타며 나에게 성우 체험을 선사한 것으로 끝났다.

그 덕분이랄까. 고등학교로 진학한 후에 나는 아예 소설가로 꿈을 바꾸고 대전 시내 고교생들로 이루어진 문학 동아리에 들어갔다. 그 모임에서 나는 윤을 만났다. 그러나 오로지 소설습작에만 집중했던 때라 신상이야기까지 나눌 짬이 없었다. 솔직히 동급생인 윤의 산문은 내 눈 높이에 맞지 않아 번번이 그에게 지독한 혹평을 했던 기억만 남아있다. 혹시 그래서 그가 소설을 일찍 접은 건 아닐까?

동아리에서는 12월이 되면 지금의 웨딩 홀이 비는 자투리 시간에 맞춰서 문학의 밤행사를 했다. 회원들이 직접 쓴 시나 산문을 한두 편씩 엮어 동인지를 내고, 자신들의 작품을 직접 낭독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그 무렵은 학생들 대부분이 문학 청소년이던 시절이어서 웨딩 홀은 언제나 만원이었다. 윤도 나도 동아리에 애착을 가지고 열성을 다해 참여했다.

졸업한 그해 대학입시에 실패하자, 나는 스스로에게 실망하여 그 무렵의 인연들을 모두 끊었다. 뒤늦게 대학에 들어가고 소설가가 되었어도 나는 소중했던 기억 대부분을 잊고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지 않고 나를 초대해 준 고마운 친구 윤. 나의 옛 친구가 자신이 선택한 나라에서 성공적인 이모작을 끝내고 화려한 귀향을 하기를 마음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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