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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선옥(시인, 논산문화원장)

[권선옥 명사칼럼] 대들보보다 장작개비가 더 필요한 세상

  • 칼럼
  • 입력 2019.02.19 16:54
권선옥 시인
권선옥 시인

봄이 온 줄 알았다. 소나무나 대나무같이 사계절 늘 푸른 나무라도 한겨울 색깔과 늦겨울의 색깔이 다르다. 한겨울에는 잎이 시들지는 않았으나 몸을 움츠려 어두운 녹색을 띤다. 그러나 봄이 가까울수록 그 빛깔이 밝아져 연한 녹색으로 변하여 마침내 새잎이 돋는다.기온만 올라간 게 아니라 이렇게 나뭇잎도 색깔이 변했다. 아내는 내일이 춘분이라고 추임새를 넣었다. 그래서 마늘밭에 씌워 두었던 비닐을 걷었다. 비닐 속에서 키가 자라 고개를 숙이고 지내다가 따뜻한 햇볕 아래서 어깨를 쫙 펴고 기지개를 켜는 것 같았다.

그동안 고개도 들지 못하고 얼마나 답답했을까. 신선한 바람도 쏘이고 싶었을 것이다. 이만큼 날이 따뜻해졌으니 비닐을 통하지 않고 햇볕을 받아도 좋은데 왜 비닐을 벗겨 주지 않느냐고 나를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마늘밭의 비닐을 벗기고 나니 나도 둘러쓰고 있던 멍에를 벗은 듯이 마음이 가뿐했다. 그런데 그 다음날이 되자 날씨가 다시 쌀쌀해졌다. 찬바람이 불고 다시 땅이 얼어붙었다. 아뿔싸. 내 이럴 줄 알았다. 해마다 봄이 온 것 같았지만, 봄이 그리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오던가. 아니었다.

봄은 느릿느릿 온다. 봄을 애타게 기다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봄이 어느 날 갑자기 와 있는 것 같지만 간절하게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봄이 그리 쉽게 오지 않는다. 오다 섰다 오다 섰다를 반복하고, 때로는 몇 발짝 뒷걸음을 치기도 한다. 그렇게 느릿느릿 오기 때문에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더욱 간절해지고 그래서 봄의 의미는 더욱 커지는 것이다. 동지섣달에도 강아지 이름을 부르듯 불러서 봄이 온다면 그 봄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양지쪽의 수선은 싹이 손가락 한 마디쯤이나 자랐다. 봄기운이 번졌으니 이제 쑥쑥 자라서 곧 해맑은 얼굴의 수선화가 피어날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환해진다. 어떤 일은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또 어떤 일은 생각하면 마음이 환해진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가 있는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사람, 이 세상을 따뜻하고 편안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 자기가 맡은 일에 정성을 다하는 사람, 일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 더디고 수고로운 것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 작은 것에 마음 쓰는 사람은 곁에 있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한다.

한 사람의 작은 정성과 사랑이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로 군불을 때서 따끈따끈하게 이 넓은 세상을 덥힌다. 눈보라에 파랗게 질린 사람들을 녹여 새 힘이 솟게 한다.태산준령에 우뚝 솟은 거목은 고대광실을 짓는 재목이 된다. 그러나 총총 옹이가 박히고 삐뚤어져 재목으로 쓰이지 못하는 나무는 나무꾼에게 베어져서 한 개비의 장작이 된다. 그 장작이 아궁이에서 불살라짐으로써 따끈하게 방을 덥혀 사람들이 서로 등을 기대고 살아가게 한다. 썰렁한 냉기가 도는 고대광실보다 따뜻하게 온기를 지닌 초가삼간이 사람을 살린다. 이 장작의 일생은 비록 짧으나 몇 백 년을 사는 누각의 대들보보다 값이 덜 하다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세상은 이 못난 나무들에 의해서 살 만한 재미와 희망을 가지게 한다. 그래서 세상은 많은 대들보나 서까래보다 한 개비의 장작이 더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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