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뉴스=이철휘기자]
사람을 제대로 보려면 그 사람의 만년(晩年)을 보라고 했다.
요즘, 젊은 시절부터 어렵게 쌓아 온 명성을 늙어서 제 손으로 다 허물어 버리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행백리자(行百里者)는 반구십리(半九十里)라고 했던가? 100리 길을 가는 어진 사람은 90리 길을 절반으로 삼아 너그러운 마음과 덕행을 쌓아가면서 목적지까지 묵묵히 간다는 뜻이다. 거의 목적지인 90리 길을 오고서 비로써 반쯤 왔구나하는 여유 있는 생각을 가져야 인생의 연륜에 아름다운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고 본다. 인생 70이라는 종심(從心)의 나이에도 그칠 줄 모르는 도전과 집념으로 하루가 다르게 열심히 배우고 익히며 미지의 세계를 더듬어 가는 노금선 박사를 만났다.
노 박사는 남다른 DNA인자를 가지고 태어난 것인지 만능 재주꾼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요새 정상급 연예인들에게 많이 인용되는 “만능엔터테이너”라고 칭해도 괜찮을 것같다. 지난해 고희(古稀)를 넘은 나이에도 주경야독으로 한남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주변을 놀라게 했다.
노 박사는 이름 앞에 수식어가 많이 붙는다. 전직 아나운서출신으로 시인에다 시낭송가며 화가다. 현재는 노인들의 손과 발이 되어 처녀시절 동경했던 사회복지사로 사회복지법인 선아복지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일은 수년 전 세상을 떠난 남편의 유지이기도 하다.
이렇게 자기계발을 게을리 하지 않고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따스함이 흠뻑 느껴진다. 알게 모르게 우아한 향기가 우러난다.
나무의 ‘나이테’를 보면 그 나무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듯이, 사람의 얼굴표정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 왔는가를 거울 보듯 가늠할 수 있다. ‘나이테’가 많을수록 나무는 더 단단해지고 허리가 굵어져 모진 풍파에도 이겨낸다. 사람의 경험이 켜켜이 싸여 숙련되는 여정을 우리는 흔히 ‘연륜’이라고 부른다.
노 박사는 대전MBC 아나운서로 활동하다가 한 남자를 만나 30여 년 동안 내조를 위해 일찍이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온갖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왔다. 노 박사는 그동안 세 번 시집을 펴냈다. ‘사랑’과 ‘행복’, ‘희망’ 등 따뜻한 언어를 구사하여 보는 이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그렇지만 그의 시 ‘전당포’같은 작품에서는 지난날의 고뇌와 아픔을 겪어야만했던 추억도 엿볼 수 있다.
‘전당포’를 잠시 보자. 칠십 년도 더 된 낡은 건물/ 가파른 삼층 계단 올라가면/작은 철제 창문 앞에/늙은 주인이 앉아 있다/시집온 지 몇 년 안 된 새댁/남편 사업 망하자/전당포 들락대며 쓸 만한 물건 다 갖다 주고도/결혼 예물로 받은 손목시계를 풀어야 했다/숱한 사연과 울음이/켜켜이 쌓인 전당포/그늘진 물건들 이름표 달고/주인 기다리는데/ 찾아오는 이 조차 뜸해진 그곳에/일생을 저당 잡힌 채 늙어버린 주인이 있다/역 건물도 바뀌고 기적 소리도 바뀌었는데/옛 모습 그대로 낡아 버린 전당포/어딘가에 저당 잡힌 우리네 삶도/그렇게 허물어지고 있겠지(세번째 시집 '그래도 사랑'에서 발췌)
이 작품은 노 박사가 친정아버지로부터 결혼예물로 받아 소중하게 간직해왔던 스위스제 시계를 가난에 못 이겨 전당포에 내 놓을 수밖에 없었던 지난날의 회한을 읊어내 가슴 뭉클한 감동을 준다.
한편, 그림쟁이로 소문난 노금선 박사의 작품 속에는 크게 두 가지의 공통된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여리여리한 한 여성의 삶의 모습이 엿보이고, 다른 하나는 강렬하고 남성적인 긴장감을 준다. 그 모든 장르를 넘나들면서 동일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은 평생 살아온 작가의 고난과 아픈 상처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치는 모습이다.
보통, 동양화라고 하면 서예적인 맛을 담아 붓의 필 먹으로 그려내지만 제한된 색채가 담겨져 있는 게 특색이다. 이러한 장르의 성격에 작가는 자신의 삶을 비유하여 남편으로부터 겪었던 외로움과 한을 붓으로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마치 색채가 있는 듯 없는 듯한 표현은 자신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우유부단한 소극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듯 하다. 하지만 일부 강렬하고 두꺼운 붓의 터치에서 고되고 힘든 삶을 이겨내려는 강인한 엄마의 모습이 그대로 새겨져있다.
작가가 그린 수채화 작품에서도 야수파의 마티스를 연상케 하는 색채감이 표현되어 단조로운 색상이면서도 강렬하다. 작가의 색채 표현이 잔뜩 긴장되고 두려움 속에서 맹렬히 싸우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게 한다.
노 박사는 중앙대학교 문창과를 졸업하고 한남대학교에서 ‘생명의식의 추구와 시적구현’이라는 제목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첫 번째 시집 ‘꽃 멀미’(도서출판 엘로이 2012) ,두 번째 시집 ‘그대 얼굴이 봄을 닮아서’(시와정신 2015), 세 번째 시집 ‘그래도 사랑’(아트북 2018)을 펴냈다. 지난해 한국문화예술명인회가 선정한 ‘자랑스런 대한민국 명인 1호’에 뽑히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