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는 여배우나 유명 정치인, 대중 인기 가수들의 얼굴을 그려 치부하는 화가들을 우리는 무어라고 칭해야 할까?
뉴욕 다다이즘의 창시자 듀상은 이미 만들어진 것을 발견하는 행위만으로도 예술행위라 하면서 미술관에 남성용 소변기를 전시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앤디 워홀(1928~1987)은 100장, 200장씩 실크스크린으로 작품을 찍어내면서 상업미술과 순수회화의 벽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뉴욕미술의 2세대인 워홀은 체코슬로바키아 이민자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피츠버그 인근의 시골에서 백화점 윈도우 장식을 하며 소일하던 그가 단돈 200불을 들고 뉴욕을 찾은 것은, 이미 프랑스 파리와 대등한 예술의 도시로 성장한 뉴욕에서 상업미술가로 출세하고 싶어서였다. 그는 순발력 있게 뉴욕 광고업계를 석권하며 큰 성공을 거두더니 잡지사를 사들이고 포르노 삼류영화를 만들다가 아예 실크스크린을 찍어내는 공장을 설립하면서 상업미술이건 순수미술이건 돈버는 것이 최고의 예술이라고 큰소리치기에 이르렀다.
대부분의 화가들은 자신의 철학적 미학을 철저히 지키며 그림을 발전시킨다. 빛을 분석하며 오전, 오후의 햇빛을 비교한다던가 빨강, 노랑을 나란히 점묘로 표현하여 주황색으로 보이게 하는 점묘법을 유추한다던가, 보이는 사물의 각도를 종합하여 특징을 뽑아내 재구성하는 입체파를 탄생시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앤디 워홀은 워홀이즘이라는 별명이 생기도록 1불짜리 지폐 혹은 100여개의 코카콜라 병을 나열하여 화면을 채우는 방법으로 팝아트를 완성시키면서 뉴욕에서 가장 성공한 화가가 된다. 화단의 일각에서는 아직도 그를 상업미술가 이상으로 평가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그럼에도 그는 뉴욕미술 2세로 역사에 남을 만큼 성공한 화가인 건 분명하다. 그의 성공은 뉴욕의 자유스러운 창작분위기 덕분일 것이며 이것은 시대를 잘 만난 그의 행운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세계미술에 한 장르를 선물한 것만으로도 앤디워홀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본다.
아직도 뉴욕은 새로움에 목말라하는 도시 같다. 나를 비롯하여 우리 화가들은 늘 새로워지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