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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미 명사칼럼] 설날과 옥분 언니
[김해미 명사칼럼] 설날과 옥분 언니
  • 이철휘 기자
  • 승인 2019.01.31 15: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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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미(소설가, 대일문인협회 회장)
김해미(소설가)
김해미(소설가)

별다른 놀이기구가 없었던 어린 시절, 대전 보문산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큰 놀이터였다. 동네 오빠, 언니들과 어울려 봄부터 가을까지, 나는 선 머슴애처럼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놀았다. 때로 아카시아, 진달래. 찔레꽃은 물론이고, 다래와 산딸기, 까마중을 간식거리로 삼았다. 그러다가 날이 쌀쌀해지고 설날이 가까워지면, 그때그때 부모님들이 자리를 비운 빈 집에 모여들어 연극 연습에 몰두하곤 했다.

우리들 중에 나이가 많은 오빠나 언니가 나름대로 창의력을 발휘해서 만든 극본은, 동화책에서 빌려온 여러 캐릭터들의 짜깁기에 불과했지만 어린 우리는 꽤나 진지했다. 설날이 되면 어른들 앞에서 공연을 하는 것이 우리들의 최종 목표였다.

막상 설날이 되면 우리는 어른들 손에 이끌려 고향에 다녀오기 바빠서, 단 한 번도 연극 공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다음 해가 되면 우리는 지치지도 않고 새로운 연극을 준비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해 겨울. 마침내 우리에게도 꿈의 무대를 실현할 기회가 생겼다. 바로 동네에 작고 아담한 교회가 생긴 것이다. 선교사는 용케도 우리를 찾아내어 극중 중요 배역을 맡겼다. 너무 어려서 딱히 맡을 역이 마땅치 않은 나에게는, 성탄 축일의 첫인사가 주어졌다. 선교사의 지도대로 내 생애 처음으로 무대에 올랐다. 엄마가 특별히 설날에 입도록 마련해 준 색동저고리와 빨간색 치마를 미리 챙겨 입고, “여러분, 오늘은 즐거운 성탄절이예요. 메리 크리스마스! 언니, 오빠들이 열심히 준비한 성극 기쁘다, 구주 오셨다를 재미있게 보아 주세요!”

인사를 하고 손을 흔들고 내려왔다. 짝짝짝! 동네 어른들이 쳐주는 박수소리에 귓불까지 빨개졌다. 마리아와 요셉으로 분한 혜옥 언니와 철이 오빠는 참말 마리아와 요셉이 환생한 것 같았다. 아기 예수 인형에게 예를 갖추는 목동 역의 정훈이 오빠도 의젓하게 제 몫을 해냈다.

성 미카엘 천사처럼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빛바랜 내 사진 한 장에는 바로 그날의 설렘, 기쁨, 성취감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설날이 가까워오면 나는 때때로 내 첫 공연 무대와 함께 우리들의 연극 연습장면이 떠오른다. 이제는 그 모임의 주도자가 혜옥 언니였는지 철이 오빠이었는지도 헷갈린다. 그들과도 연락이 끊긴지 오래라 물어볼 길이 없다. 최근에야 나는 오랜 시간 병마에 시달리고 있던 옥분언니 생각이 났다. 볕이 좋은 오후이면 해바라기를 위해 툇마루에 앉아 조용히 웃던 옥분 언니. 우리들이 연극연습을 할 때마다 자기 집을 선선히 내어 주고 과일이며 간식거리를 내오던 그 손길을 어찌 잊고 살았을까?

처음으로 양과자를 맛본 곳도 바로 옥분 언니 집에서였다. 언니는 우리의 연극에 대해 조언도 아끼지 않았고, 더러는 대본도 고쳐 주었다. 그 모임 중에 유독 어린 나를 위해 배역도 많이 챙겨 주었던 것 같다. 아마도 우리들 중 제일 연장자이고, 어머니가 동네 반장이었으니 실질적인 리더는 옥분 언니이지 않았을까?

지금 우리는 목소리 높여 부르짖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T. V 만 키면 언제 어디에서나 튀어 나오는 목청 큰 사람들 때문에 아예 T. V와 등지고 사는 이들도 적지 않다. 언제쯤이면 우리는 조근 조근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는 참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언제쯤이면 너와 내가 스스럼없이 만나 소통하며 살 수 있을까?

늘 한 결 같이 없는 듯 있는 듯, 같은 자리에서 주위사람들에게 빛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오래도록 기억되는 옥분 언니같은 소중한 사람들이 그래서 더욱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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