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5일은 뉴욕에서 ‘아프리칸 아메리칸 데이’라는 미국 흑인의 날이다. 뉴욕엔 이 날 뿐만이 아니라 ‘멕시칸 인디펜덴스 데이’이니 ‘웨스턴 인디언 퍼레이드 데이’니 하는 기념일이 넘치게 많이 있다.
1974년. 막 뉴욕생활을 시작했을 때의 일이다. 이웃에 사는 흑인들이 눈만 마주치면 “what's happing man (or brother)?” 혹은 “what up (brother)?” 하고 인사를 건네는 게 아닌가. 그때까지 “how are you?” 만이 인사말인 줄 알고 있는 내게 이 무슨 황당한 상황이 펼쳐진 건지. “how are you?” 대신으로 흑인들의 관용어가 막 유행하기 시작된 때인지라 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엄청 당황했다. ‘happy’와 ‘happen’은 어원이 같다던가. 타의에 의해 노예로 팔려 다닐 수밖에 없는 조상을 둔 흑인들의 분노에서 기인한 것이라 하겠으나, 말의 끝에 ‘brother’를 붙이므로 너와 나는 형제라는 의미이니 듣는 나는 괜스레 불편했던 기억이 난다.
뿐인가. 빌딩숲 뒷골목에서 빈 깡통이나 플라스틱 바스켓을 뒤집어 놓고 드럼처럼 두드리며 흐느적거리던 흑인들의 모습은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그들의 춤사위와 음악이 지금은 ‘힙합’이나 ‘랩’이라는 당당한 음악 장르로 인정받고 있다. 마약 과다복용으로 1988년. 27세의 나이로 요절한 아이티의 이민자 아들인 장 미셀 바스키아의 ‘낙서화’가 오늘날 버젓이 그림의 한 장르로 인정받는 것처럼 말이다.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100여개 각기 다른 국적의 화가들이 모여 있다는 뉴욕의 그림세계는 오늘도 이렇게 요동을 친다. 비디오 아트 창시자로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한 백남준, 뉴욕에서 유명을 달리한 후, 대한민국에서 국민적 사랑을 받고 있는 ‘우리는 어디에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라는 명화를 남긴 김환기. 뉴욕을 사랑했지만 결국 파리로 건너가 둥지를 틀 수 밖에 없었던 물방울 작가 김창열.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화가들도 많지만 꼭 명성만을 위하여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어차피 창작이란 새로운 날들을 살아가는 다른 언어이거늘.
2000년에 캔버스에 물감을 흘려 내리는 작업을 하다가 중단하고, 잠시 대전 배재대학에서 교수직을 수행하느라고 미루었던 작업을 이제야 다시 펼쳐 마무리한다. 이게 바로 아시안 게임에서 우리 대한민국 축구가 내게 준 에너지 덕분이다. 모르긴 해도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면 각기 서 있는 곳에서 다들 각자의 방법으로 나라사랑을 표현하며 살고 있을 것이다.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음악가는 음악으로, 운동선수는 스포츠로!
요즘 나의 그림이 그 어느 때보다 탄력을 받는 중이다. 예전에 안보이던 궁색함과 답답함이 이렇게 선연하게 눈에 들어올 수가 없다. 요즘만 같으면 이제 뭔가 제대로 그려낼 수 있을 것 같다.